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 2006. 1. 25 - 2. 7, 인사갤러리
참여작가 : 김도희, 김성배, 김찬동, 김효연, 노승복, 도병훈, 사혜정, 안원찬, 양혁진, 오상길, 유지숙, 육순호, 이태한, 정승채, 최선
후원/지원 : 인사갤러리 / 서울문화재단
웹사이트: http://icas.new21.net/insa2006
토론: http://www.urlless.com/bbs/zboard.php?id=200601250207



전시,〈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기획의 변

늘 해온 얘기이지만, 나는 미술을 예술가들의 ‘미술 하는 일’과 ‘그들이 생산한 미술의 가치를 문화적으로 소비하는 일’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즉 미술은 ‘무엇이 미술로서의 가치인 것인가’에 관한 근원적인 회의懷疑로부터 시작하여, 방법과 존재방식으로서의 대안을 생산하고, 그런 미술이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함께 공유하는 문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자들은 이 말이 너무 원론적이고 그래서 고루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발언들을 지금껏 철저하게 경계해 왔다. 오히려 미술작품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다 미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미술작품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미술’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런 식의 발언과 맹목적인 트렌드 지향성으로 핵심적인 쟁점과 이슈를 회피하며, ‘스타일’의 반복 재생산을 통해 예술을 교란시켜온 사이비들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현대미술의 성격상 예술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이 만든 ‘그것’이 예술작품일 수 있는 비평적 근거를 스스로 제시하고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 한국의 미술계가 비평적 검증을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다는 현실은 곧 미술계가 현대미술로서의 진정한 가치와 아류들의 사이비 문화가 혼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며, 우리 모두가 이 불투명한 담론의 구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므로, 비평적 검증의 요구가 더욱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될 뿐이다. 현대미술 맥락 속에서의 ‘스타일’은 각 예술가 개체 단위의 고유한 code와 idiom일 뿐, 이것의 차용이 곧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보증해 주는 상표가 되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전시회 역시 단지 작품을 늘어놓고 보여주는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미술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미술의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발표를 목적으로 하는 전시회는 각 예술가들의 성취를 사회와 역사를 향해 제시하는 일이자, 예술가 자신들에게는 ‘좌표를 점검하는 일’쯤 되는 일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전시들은 관람자들에게도 단지 ‘구경꺼리’일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감상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미술의 방법으로 이 시대의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문화적 담론을 생산하는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현재 우리의 형편상 아주 요원한 기대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정에 관해 무관심해 질 필요가 있다. 예술가들의 ‘미술 하는 일’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인정받기 위한 일이 아니며, 관람자들을 설득하는 일 또한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에게는 그들 자신들만의 현실reatity이 중요할 뿐이며, 사회는 이것을 1,000보장해야 한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현실에 관한 무관심은 역사를 통해 당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예술적 성취로 평가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반향이 있는가는 늘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관람자들이 ‘감상’을 통해 미술의 문화적 가치를 소극적으로 향유하고 누리려고만 하는 이상, 그들은 오래 전부터의 대중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늘 먼발치의 관객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직도 ‘미술’을 그렇게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예술가들의 ‘계몽’은 세속적인 대가를 얻기 위한 성급한 시대착오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제도와 시스템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오늘의 미술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을만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일 뿐이다. 비평가들과 큐레이터들, 저널리스트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이 이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미술의 영역 내부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문제삼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가들이 먼저 ‘미술 하는 일’의 적극적 생산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한, 모든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대중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먼저 ‘미술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생산하고 있음을 미술의 방법을 통해 스스로 규명하고, 이 가치의 문화적 소비체계를 바로 세우고 난뒤, 감상자들을 초대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지난 30여 년간 한국의 미술계에서 극심한 ‘소외’를 느껴 왔는데, 그것은 사람들간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고립감 따위의 센티멘탈한 감정이 아니라, 아무런 생산성도 담보하고 있지 못한, 많은 경우에 있어 이미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미술의 가치들을 손쉽게 퍼 옮기거나, 어설픈 번역수준의 아류문화를 만들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느끼는 지독한 고독감 같은 것이었다.
한국의 미술계는 남에 의해 생산된 미술의 가치들을 빠른 속도로 몰가치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소비하고 있는 측면이 있고, 그런 만큼 이 땅의 자칭 예술가들이라는 사람들 대부분은 미술문화의 ‘생산자’들이 아니라, 한갓 서구미술의 소비자들로 전락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제살 파먹기’ 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미술의 현실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현실이 이 땅의 진정한 예술가들을 늘 고독하게 만들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이 환경은 오히려 ‘미술을 하기’ 위해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일 수도 있다. 때문에 나는 예술가들이 이런 환경을 탓하기보다 그 속에서 여유를 찾아 충분히 즐기며 각자의 ‘미술 하는 일’을 보다 견고하게 다지는 조건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이 시대의 ‘미술’은 한국의 이상한 예술가들과 비평가들 그리고 관객들이 ‘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진정한 예술가들의 ‘미술 하는 일’의 힘에 의해 이끌어져가는 것이며, 예술가들에게 있어 ’미술 그 자체‘는 이런 환경들과 전혀 몰관계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 속에는 비록 절대 다수는 아니지만, 현재 한국의 예술가들보다 훨씬 더 탁월한 안목과 지성을 겸비하고 있는 상당수의 대중들이 공존하고 있다.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오히려 그들의 기대치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술가들은 유명해져서 잘 먹고 잘 사는 기회를 잡는 일보다 자신의 그릇이 넘쳐 흐를 때까지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야 하고, 기회는 준비된 사람들에게 먼저 제공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미술계가 가져야 할 윤리이자 투자 전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보여주고 있는 ‘배타적 이기주의’는 쪽박깨지고 있는 현실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의 개탄스러운 모습일 뿐이다.
준비된 예술가들이든 그렇지 못한 예술가들이든 우리는 모두 사회로부터 지원을 기대하기 전에 그 사회로부터 ‘미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유념해야 한다.

이번 전시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각자의 ‘미술’을 해 왔다고 판단되는 분들과 앞으로의 ‘미술 하는 일’이 기대되는 분들을 한자리에 초대하여, 현재의 좌표를 함께 점검해 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즉 우리가 오늘의 미술-텅 비어 있는 통로 한 가운데를 각각 어떤 코드와 방법으로 교차하고 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현재의 위치와 방법 그리고 방향성에 관해 생각을 모아 보자는 것이다.

2005년 12월 오상길(작가, 《예술의 표면과 이면, 그리고 리얼리티》展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