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AS 서울현대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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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미술의 쟁점#9 - 작가의 변신은 무죄? - 박서보(1)





한국현대미술의 쟁점#9 - 작가의 변신은 무죄? - 박서보(1)


앵포르멜 미학을 제창했던 프랑스의 미술비평가 미셀 타피에의 주장에 따르자면, "유럽의 전후추상, 즉 앵포르멜 Art-Informel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실존주의적 허무와 파괴의 표현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큐비즘까지의 오랜 고전주의 미술과의 결별이자, 다다의 정신적 계승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앵포르멜의 격정 그 자체는 다다적 허무와 반항의 표현이 아니라 '원자핵적 우주관에 대응하는 새로운「구조」와「내용」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었다."1)

앵포르멜은 유럽미술의 근간이 되어왔던 회화적 형식과 구조 자체-사각형의 캔버스 안에서 이루어져 온 수평과 수직의 구조에서부터 대상 재현이나 상징의 표현들, 형태와 음영, 원근법, 심지어 스케치나 아이디어, 습작 따위까지, 회화에 관한 인식 자체를 밑바닥에서부터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수준의 전환을 지향하는 것으로, 해체와 전복의 전제-유럽의 고전적 회화전통의 반동이라는 측면에서의 의미와 역사적 위치를 갖는 미술이다.



1.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2) 繪畵NO.1-57에 관하여


시점 - 앵포르멜을 몰랐고 본 적도 없었다?
박서보 씨는 그동안 <繪畵NO.1-57>이 "숫돌로 갈다가 우연히 발견한" 그림이라고 주장해 왔다.3) 당시엔 앵포르멜을 전혀 몰랐고 본 적도 없었으며, 따라서 앵포르멜 작품들에 관한 참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린 '완전한 창작'임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1955년 경부터 국내 일간지나 각종 매체 등에서 김영주 씨를 비롯해서 방근택 씨 등이 앵포르멜 미술을 소개하고 있었고, 당시 젊은 작가들의 정보채널이었던 일본 미술잡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잡지들에도 무수히 소개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56년 11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전미국대학미술학생작품전'이 열렸고, 이 전시에 관한 김영주 씨의 서평이 2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실렸었으며, 경향신문에는 '자유自由와 실험實驗'이라는 김병기 씨의 전시평이 실렸다. 이 전시는 1951년 미국이 야심적으로 기획한 MoMA의 <미국추상회화조각전> 이래 미국 미술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던 대학생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기회였다는 측면에서, 이런 기회가 전혀 없었던 당시 우리나라의 수도에서 열린 첫 전람회였다. 당시 박서보 씨는 국전에 출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전 반대'를 외칠 만큼(4인전, 1956) 시류를 타고 있었는데 이 전시와 일간지의 서평도 전혀 보지 못했고, 현대미협 동료들을 통해서도 전해들은 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듬해인 1957년 4월 미국 시애틀 박물관이 기획하고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이 주최한 '미국현대8인작가전'이 서울에서 열렸고, 마크 토비 등 주요 작가들의 작품이 선을 보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 수준의 국가였으므로,  이런 전시가 당시 젊은 작가들에게 어떤 비중을 가지고 다가왔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전시는 거의 모든 일간지가 앞 다투어 보도했고, 전시평도 다수 실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박서보 씨가 1957년 작품이라고 주장해 온 <繪畵NO.1-57>은 그가 참여하기 시작했던 현대미협 2회전(1957.12.8.~14. 화신화랑)에서도 발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전시의 평을 썼던 이봉상 씨는 '정상화된 『그룹』행동 - 현대전을 보고(서울신문 1957. 12. 18)'라는 글에서 당신이 아끼던 제자 박서보 씨의 작품에 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내어 놓고 있다.

"박서보의  『벽』 『얼굴』은 『후렛쉬』하며 가장 직접적인 감명을 던져주는 가작이라 하겠고 이 작가만큼 화면에 대결하여 작품에 있어서 화면효과를 결정조건으로 생각하는 작가도 드물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대담한 색과의 대결, 조형과의 대결을 바란다."4)

1957년 당시 <繪畵NO.1-57>의 존재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기는 한지 의문이다. 박서보 씨와 함께 활동했던 현대미협 작가들의 대담을 통해서도 1957년 당시 <繪畵NO.1-57>이란 작품을 보았거나 박서보 씨를 통해서 그런 작품의 존재에 관해 전해들은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평적 관점 - <繪畵NO.1-57>의 전조현상과 현대미협의 문화적 후위활동
박서보 씨가 국전에 출품하던 시절(1955-1956)의 작품들 속에서는 이듬 해 작품이라고 주장해 온 <繪畵NO.1-57>의 어떤 전조현상도 보이지 않는다. '전조현상'이란 그림의 외형에 나타나는 스타일상의 특징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작품의 모티브나 형태가 <여인좌상>이나 <닭>에서 <繪畵NO.1-57>로 완전히 바뀔 만큼 전통적 회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나 화면의 구조와 형태, 색채 등에 관한 그 어떤 비판적 각성이나 회의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한 대목이다. 이 그림들은 국전 출품용 작품이라고 할 만큼 전형적이기까지 하다.
다시 환기하는 바이지만, 이 그림들 어디에서도 유럽미술의 역사를 근원적으로 전복하고 해체시켜야 한다고 주장할만한 인식 전환의 실마리는 발견되지 않으며, 그가 줄곧 써 왔다는 일기나 작가 메모 등 그 어디에서도 그런 변화를 감지할만한 조짐을 찾아볼 수 없다.


작품명제의 변화가 의미하는 것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繪畵NO.1-57>이라는 제목이다. 작품의 명제를 넘버링으로 대체하는 것은 '화면에서 보이는 순수한 형태와 색채 이외의 그 어떤 문학적 연상도 배제'하려는 서구 추상미술의 맥락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제목을 아무런 참조도 없이, <여인좌상>과 <닭> 다음에 우연히 떠올라 작품에 붙여서 발표까지 했다는 말이다. 전후 복구로 온 세상이 어지러웠던 시기에, 세계 최빈국의 가난한 현실 때문에 물감 살 돈도 없었다는 26살의 초년생 작가가 어떤 참조도 없이 이런 그림을 어느 날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떠오른 이런 제목을 붙여서 덜컥 전시회에 출품을 했다는 말이다. 과연 이 말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繪畵NO.1-57>이 예술작품인 근거를 대라! - 이것이 현대미술과 비평의 존재방식이다!
그는 서구 추상미술의 문맥 속에서 등장한 앵포르멜 양식과 작품 제목의 넘버링이 우연히 칸딘스키의 일화와 아주 유사한 경험으로 얻어졌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번지수가 한참 틀린 얘기이다. 박서보 씨의 눈에는 앵포르멜이 칸딘스키 류의 추상양식과 비슷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칸딘스키가 우연을 거쳐 도달하고 있는 바와 앵포르멜은 경로와 개념, 이데올로기, 미술사적 위치와 방법론 모두가 전혀 다른 것이다.
만일 정말로 박서보 씨가 우연하게 <繪畵NO.1-57>을 만들었다면, 그건 맥락이 없는 사생아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서 외형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점 외에 그것을 미술작품이라고 평가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는 말이고, 이런 저런 문맥과 무관하게 우연히 만들어진 물감 흔적들을 박서보 씨가 왜 미술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그 흔적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면 아무나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말이 되고, 그렇게 아무나 우연히 만들 수 있는 것이 어떻게 예술작품일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박서보 씨가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현대미술의 생태구조와 존재방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흥미로운 것은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6개월 뒤엔 현대미협 동료들 모두가 앵포르멜을 공유하고 전시장에 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왜 자신의 순수 창작인 추상양식을 동료회원들이 차용했다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의 유비현상 주장에 숨겨진 '자가당착'
6.25 전쟁의 참상에 대한 경험의 공유를 근거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타났던 앵포르멜과의 유비현상을 자신들의 시대적 알리바이로 내세우고 있는 대목에서는 안쓰러운 자가당착을 보게 된다. 수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는 전쟁터를 피해서 병역기피자로 숨어 지내며 도망 다니던 사람이 전쟁이 끝난 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주변에 미군잡지가 수없이 나돌고 미국의 추상미술 전시가 열렸으며, 앵포르멜 기사가 일본 미술잡지에도 도배하다시피 올라오던 때에 가서야 전쟁의 참화를, 그것도 서구의 미술형식을 빌려서 과도하게 큰 목소리로 울부짖는 것이다. 이것이 민망한 일이라는 생각은 필자만 하게 되는 것일까?
오히려 정직하고 소박하게 자신의 온전한 경험에 집중했더라면, 이 젊은이는 우리 미술의 역사에 정말 중요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 '변신'과 '미학적 자기 변절' - Persona

기괴한 2차 변신 - '앵포르멜'에서 다시 '유사 기하추상'으로
1955년-56년 사이의 국전풍 구상회화들과 1957년-65년 사이의 앵포르멜 사이의 변화가 근거 없는 1차 변신이었다면, 앵포르멜양식으로부터 1967,8년의 <유전질No.4-68>의 2차 변신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변신의 연속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비평적 관점에서 앵포르멜과 기하추상은 단지 미술양식 면에서만 다른 것이 아니다. 미술양식은 곧 미술언어-'기호code'와 '어법idiom'이며, 이 두 부류의 미술은 결코 절충될 수 없는 감각적, 인식론적 상극이라고 할 만한 미술이다.
기하추상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폴 세잔의 다시점과 평면구조의 모순으로부터 시작된 서구 재현미술의 형태 해체과정을 심화한 큐비즘과 그 원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 구조만으로 완전한 추상에 다다른 몬드리안과 De Stijl 운동에 기초하고 있는 소위 '차가운 추상' 미술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하추상은 외형적으로는 추상적 특징을 띠고 있지만 그 뿌리가 서구의 전통미술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앵포르멜은 앞서 미셀타피에의 말을 통해 확인되듯, "큐비즘까지의 오랜 고전주의 미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기하추상 같은 미술을 전복하려 등장한 이른바 '뜨거운 추상' 미술이다. 박서보 씨는 이런 앵포르멜을 몇 년간 '뜨겁게 외치다'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앵포르멜의 전복 대상인 기하추상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것이다. 이런 행태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여정을 50여년 넘도록 20세기 한국현대미술 역사의 중심에 위치시켜 온 미술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안목과 행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원형질NO.18-64>까지의 비정형회화들로부터 <유전질No.4-68>로의 획기적 변화를 뒷받침하는 작가의 논리나 그를 두둔해 온 평론가 및 미술사가들의 주장들, 작품에 나타나는 전조 및 후위현상, 작가일기, 작업메모들 중 그 어떤 것도 확인된 바가 없다. 필자는 평생 이런 극과 극을 넘나드는 변화를 본 적이 없다.

이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타고 가던 앵포르멜 버스를 기하추상이란 새 버스로 갈아타는 일'일 것이다. 창작의 고뇌나 창의성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로서 민망하기 짝이 없는 유행에의 편승이자, 백화점에서 쇼핑하듯 남의 미학과 미술양식을 손쉽게 차용하는 일이고 '미학적 자기 변절'이 아닐까?


그렇다면 <유전질> 시리즈들을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문제는 이런 것도 예술작품이라고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미술대학 졸업한 사람이 캔버스에 그리면 다 예술작품이 되는 게 아니라면, 우린 적어도 어떤 것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이 작품의 어떤 점이 어째서 예술작품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인지에 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미술의 역사를 논하고 기록해 가기 위한 일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필자는 오늘날 우리 미술계가 이토록 혼탁한 환경 속에 빠진 이유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거듭되는 '변신' 또는 '미학적 자기 변절' 그리고 위협받는 20세기 한국현대미술사
1968년의 유사 기하추상과 1969년의 <유전질 No. 6-69> 사이에도 납득되지 않는 3차 변신이 관찰된다. 이것은 '유사 기하추상'에서 다시 '형상회화'으로의 납득하기 어려운 변화이며, 3차원 입체물 제작이라는 또 다른 차원으로의 4차 변신(유전질, 1969)도 같은 해에 이루어졌다. 뒤에 다루겠지만 묘법을 1967년부터 제작했다는 박서보 씨의 주장대로라면 앵포르멜 이후에 1967년 <묘법>을 하다가 1968년엔 유사 기하추상 <유전질 No.1-68>을 그리고, 1969년엔 다시 <유전질 No.6-69>의 형상을 그리다가 입체 설치작업도 만들고, 1971년부터 다시 <묘법>을 한 셈이 된다.

문제는 <유전질No.3-1968>과 <유전질 No. 6-69> 사이의 변화는 단순히 '추상'회화를 그리다가 '형상'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아마추어 화가는 물론 이것도 그릴 수 있고, 저것도 그릴 수 있다.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20세기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를 논하고 진술해 가는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직업적인 작가의 작품세계의 문제라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 된다.

비록 서구미술 중심의 담론이라고는 하나, 현대미술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인류가 함께 천착해 온 가장 수위 높은 정신사의 치열한 가치를 담고 있다. 전 세계의 탁월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이 '죽기 살기'로 매달려 왔고,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수준 높은 미의식과 첨예한 이론으로 무장한 컬렉터들과 미술관들의 사랑을 받아온 예술인 것이다. 현대미술 속에는 미니멀아트의 극히 미미한 일부가 '아이폰' 디자인 신화의 영감으로 활용될 수 있었을 만큼, 그 난삽한 외피 속에 놀라운 문화적 가치들을 채워놓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역사적인 예술작품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예술가들이 평생 최선을 다해 탐구하고 고뇌하며 도달한 형식과 담론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외심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깊숙이 탐색해야 그 가치를 통해 '아이폰 신화'같은 창의적 재생산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박서보 씨는 역사적 통증에 시달리던 사회를 향해 느닷없이 격앙된 목소리로 서구의 '앵포르멜'을 마치 자기 것 인양 외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역사적 뿌리가 다른 기하추상 미술을 차용해 와서 자기 것 인양 첨단의 패션을 자랑하며 '예술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이내 돌아서서 또 다른 뿌리의 미술을 밑도 끝도 없이 차용해서 '현대미술 작품'이라고 내어 놓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평생 미술을 연구하고 발표해 온 전문가이지만, 이 작품들 어디에서도 박서보 씨의 독창성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문제의 핵심은 유명 미술대학의 교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까지 지낸 미술평론가, 미술사가들이 이 웃음도 나오지 않는 어이없는 해프닝을 20세기 한국미술의 역사 중심에 위치시키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필자는 왜 이들이 고독하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진지하게 천착하다 세상을 떠난 중요한 작가들을 배제해 놓고, 이런 작가를 중심으로 20세기 한국미술의 역사를 진술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방향성도 없고 개념도 없는, 종횡무진 거듭되는 '변신'과 '미학적 자기 변절'을 서구미술 정보에 따른 유행 편승이라는 전제를 배제하고 도저히 이해할 방법이 없다. 물론 박서보 씨 역시 그 많은 발언 기회를 통해서도 이 변신에 관해 어떤 해명도 내놓지 않았으며, 이런 점들을 밝히기 위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사업  당시 필자가 여러 차례 요청했던 대담도 박서보 씨는 이런 저런 이유로 피하다가 끝내 뿌리쳤다.

따라서 이 일련의 그림들에 대해서 이 작품들의 어떤 점이 어떤 이유로 우리 미술의 역사에 남을 예술작품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박서보 씨와 그를 지지해 온 평론가 및 미술사가들에게 다시 한 번 해명을 요구한다.


해괴한 5차 변신 - '그리는 일' '지우는 일', 다시 '지우는 일' '그리는 일'
박서보 씨의 '변신' 또는 '변절'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주장대로 그의 <묘법>이 1967년에 제작되었다면, 유사 기하추상 <유전질No.1-68>이 발표된 1968년 이전에 <묘법>으로의 2차 변신이 먼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가 주장했던 대로 "회화의 의미가 '그린다'에서 '지운다'로 이행"되었다면 '그리는 일'에서 '지우는 일'로 생각이 바뀐 뒤에 최소 4년 간 유전질시리즈를 계속 '그리고 만들어'서 발표했던 셈이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되는 주장인가? 공교롭게도 이 사이에 일본 개념미술가 아라카와 슈사쿠의 사전지우기(1965년 이전)가 발표되었고, '사전을 지워 의미를 비운다.'는 개념도 박서보의 '그린다'에서 '지운다'로의 이행과 꼭 닮아 있다.

"동경화랑 야마모토 사장이 한국을 오게 됐어요. (중략) 73-74년도 한국에 오셔서 화실을 방문하셨어요. (중략)그때는 100호 캔버스 천이 없어서 다 꼬매 갖고는 100호를 만들어 그림을 그리고 했는데 꿰맨 자국이 보일까봐 밑 작업으로 흰색을 칠했어요. 그 양반이 흰색을 굉장히 매력 있게 보시면서 “그런 걸 숨기면 안 된다, 작품으로 작품성을 해야지...” (중략) "그 다음에 한국에 오니까 백색을 쓰는 것이 독특하고 일본에 없는 색상이라고 하더군요. 두 번째 왔을 때 화실에 또 왔고 더 많은 작가들을 보고 싶어 했어요. 자기가 백색군을 만들어 동경화랑에서 전시를 하면 되겠다고 일본에 없는 흰색을 그리는 작가들만을 테마를 잡고 그때의 작가들을 모았던 것이죠. 그때 박서보 선생님은 백색을 안 그릴 때였어요. 유전질을 하실 땐데..."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II, 서승원 대담5)

서승원 씨는 당시 박서보 씨와 같은 홍익대학교에서 근무하던 측근 중의 측근 교수였다는 점에서, 그가 1973년-1974년 당시 박서보 씨가 "백색을 안 그릴 때", "유전질을 하실 땐데..."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박서보 씨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배열해서 살펴보면, 1967년 묘법을 시작해서 '그린다'는 의미를 '지운다'로 이행했다가, 다시 '지운다'에서 '그린다'로 돌아가서 1968년 유사 기하추상을 그렸고, 1969년에는 다시 또 '그린다'에서 '지운다'로 이행한 다음 <묘법NO.1-69, 1969>를 제작하고, 같은 해에 다시 또 '지운다'에서 '그린다'로 마음을 바꿔 먹고 <유전질No.7-69-70, 1970>을 제작했으며, 다시 이듬 해인 1970년엔 '그린다'는 의미를 '지운다'로 마음을 고쳐 먹고 <묘법NO.20-70, 1970>을 수행자의 마음으로 제작했다는 주장인데, 이게 말이 되는 것인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일본 군국주의와 동양사상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의 사상
박서보 씨는 너무나도 유명한 칸딘스키의 일화와 아주 흡사한 주장에 이어, 묘법에 관해서도 老莊思想, 修身 같은 개념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미술이 스스로 미술이어야 할 조건과 방법을 비판적으로 증명해가고 있는 현대미술 맥락 속에서 무슨 뜬금없는 노장사상 타령일까? 툭하면 노장과 무위자연, 불교의 無를 논하는 작가들이 있지만, 이는 그런 세계 속에는 현대미술이 자리 잡을 위치가 없다는 초보적인 분별력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과 예술이 어떻게 다르고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그 본질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철학적 빈한함이 안쓰럽다.

필자는 1967년에 제작했다는 <묘법>을 당시에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다. 필자가 아는 한 1967년 제작설은 거듭 신뢰할 수 없는 말을 해 온 박서보 씨 한 사람의 주장일 뿐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박서보 씨가 일본에서 이우환 씨를 만나 '만남의 현상학'과 일본 모노하 미술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1968년의 시점보다 1년 앞선 시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것이 이우환과 일본의 모노하, 어쩌면 아라카와 슈사쿠의 영향 등을 부정하기 위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유전질에서 노장사상으로의 이행?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가 말하는 노장사상은 이우환의 사상적 배경으로 알려진 니시다 기타로의 철학, 즉 동아시아의 사상적 배경인 중국의 정신사적 패권을 무력화하고 대서구사회의 아시아 주도권을 잡기 위해 동양사상6)을 창안한 일본 군국주의가 내세운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의 사상적 배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1967년 제작설은 이런 시대적 개연성을 무시하고, 유전질 시리즈를 제작하던 박서보 씨가 또 다시 사상이나 인식의 변화, 회화적 입장의 변화를 짐작할만한 어떤 예비 조짐도 없이 갑자기 독창적으로 <묘법>을 제작하고 노장의 무위자연을 논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단순작업의 반복으로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상태를 무위자연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지켜봐 온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가 노장의 '無爲自然'과 '修身'을 논하다니 과연 그를 아는 누가 이 주장에 수긍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의구심은 그가 왜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캔버스에 연필선을 그으면서 '지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에 있다. 누가 봐도 묘법은 연필로 선을 '그리는' 작업이 아닌가? '지운다'는 개념은 앞서 언급했던 일본의 개념미술 작가 아라카와 슈사쿠의 '사전지우기'에서 등장했으며, 아라카와는 이 작업을 '언어의 의미를 지우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양치기 소년과 벌거숭이 임금님의 알레고리가 주는 교훈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제의 핵심은 '누구 걸 참조했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참조되지 않은 text란 없기 때문이고, 예술은 어설픈 글쟁이들이 즐겨 쓰는 '창조'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술의 가치와 의미는 참조의 방식과 전략에 의해 파생되는 것이며, 거짓과 위선 그리고 소아병적 영웅주의야말로 현대미술이 벗겨내려던 저 투박하고 못 생긴 껍질의 본질이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런 논거들이 박서보 씨가 이 시대의 예술가일 수 있고, 그가 걸어온 길과 만들어 온 캔버스들을 '현대미술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라는 궁극적인 의구심을 갖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미술은 '작품'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예술'일 수 있음을 증명해 나아가는 '과정Process'과 방법 속에 있는 것이다.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미술 문화는 당대의 담론을 향한 예술가들의 치열한 정신과 날카로운 비평적 분별력을 통해 생산되고, 이것을 대중들이 문화적으로 향유하고 소비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여 유통시키는 건강한 제도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눈앞에 두고 현대미술 문화를 향유하려는 시민들이 늘고 있지만, 이 기회를 성장의 계기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미술계가 안타깝다.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 규명할 수 없는 미술계에서 향유할만한 예술의 가치를 만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이다. 필자의 비판은 21세기 한국미술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려는 아주 작은 발걸음이다.

글쓴이: 오상길(작가, 비평)


각주
1) 졸고, <고난 속에서 피어난 추상>展 서문, ICAS,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 vol.3
2) 사실 필자는 이런 타이틀이 아주 민망하다. 동양 최초, 세계 최초 같은 수사들을 내세워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하거나 홍보의 극대화를 꾀했던 시절의 어두운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대미술이라는 첨예한 담론을 다루는 영역에서 비록 소제목으로라도 이런 수사를 내걸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 타이틀이 20세기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21세기의 새로운 문화담론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면 이 정도의 부끄러움쯤이야 대수이겠는가?
   덧붙여 필자는 2005년 졸저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를 통해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정식으로 제기했으나 어떤 채널로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약속했던 대로 더 심화된 형태로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세계 미술사의 주변에 머물러 온 한국미술의 위상과 남대문 짝퉁가방 수준의 유치한 비평담론 및 미술사 진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임을 밝힌다. 비록 이번 글이 박서보 씨라는 한 사람의 작가에 집중되고 있지만, 이것은 그동안 많은 논자들이 앞 다투어 그의 비중과 영향력을 추인해 왔다는 점에서 그 대표성을 고려한 것이며, 그가 누누이 주장해 온 '내 역사가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에 대응하는 글쓰기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말은 필자 역시 20세기 한국미술 역사 속에서의 그의 비중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머지않아 선명하게 밝혀지겠지만,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는 그가 주장해 온 바와 아주 거리가 멀다.
3) 박서보, 체험과 체질- 후기묘법시기, 공간 1989년 2월호
4)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V. vol.1, ICAS, 2004
5)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 vol.2, ICAS, 2001
6) 김현숙, 한국 동양주의 미술의 대두와 전개 양상,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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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과 한국의 현대미술-메타비평을 위한 질문들
20세기 한국미술 다시 읽기-조선일보 1930.12.23. 근대 태서미술 순례(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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