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AS 서울현대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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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V 심포지엄(도병훈, 작가)

근현대 ‘동양화’에 나타나는 문화 혼성의 특성 – 국전 주요 작가·작품 중심으로

도병훈(작가)

Ⅰ. 들어서며

1. 근대의 ‘기점’과 ‘더욱 나쁜 장소’의 한국현대미술?

‘근대’란 서구에서 배태된 ‘모더니티’ 정신(이성적 인간관, 자연관의 변화, 진보에의 믿음)을 기반으로 한 역사 개념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 시민혁명을 지표로 삼는다. 일본에서는 봉건적 막번 체제가 폐지되고 통일 국가가 성립된 ‘메이지 유신’을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 그렇다면 우리의 근대는 언제부터일까?

일본의 ‘근대’가 서구의 문물, 제도를 수입하여 출발했다는 연장선상에서 보면, 한국의 근대는 바로 일본(제국)의 한반도 강점기와 중첩된다.(*역사학자들 간에도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조선 후기부터의 자생적 근대론, 특히 실학이나 북학파의 영향에서 이 땅의 근대성을 찾는 것도 일본의 근현대사와 직간접적 연관성이 있다는 점만 짚고 넘어간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 알 수 있듯, 서구 현대미술은 근대의 극한적 상황에서 등장했다. 근대의 성과인 독자적인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이 없다면, 현대미술의 주된 양상인 ‘전위’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보다 먼저 서구의 근현대미술을 받아들인 일본조차 예외가 아니다.(*‘미술(美術)’이란 용어 자체가 여러 군도(群島)로 이루어진 일본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메이지기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등장한 일본의 신조어이다)
특히 '앵포르멜'을 서구로부터 일본에 도입한 1955년의 '구타이'를 '역사'가 아닌 '지표'로 치환하는, 즉 '역사로부터 일탈'로 보는 일본 미술비평가들의 비평적 담론은 왜 일본이 ‘나쁜 장소’인가를 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풍조를 또 도입하고 이식한 1950년대의 한반도는 ‘더욱 나쁜 장소’인 셈이다.

2. 근현대 동양화(한국화)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일본의 근대 회화나 조각 역시 서구로부터 수입된 장르이며, 우리의 근현대 미술은 바로 이 수입된 일본 근현대 미술의 영향으로 성립했다. 이는 단지 일제 강점기에 한정되지 않으며, 특히 50년대 60년대는 물론 70년대 초반까지도 절대적인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비역사의 양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미술계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서구의 현대미술이 근대미술에 대한 회의로부터 ‘기존의 형식을 타파하는 표현 행위’인 ‘전위’로 성립한 반면,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 (시기의) 미술 수용 과정은 ‘회의’의 대상인 기존의 형식 자체가 ‘미완’이자 심지어 ‘부재’한 상황이었다. 이런 문맥에서 우리의 근현대 미술은 역사가 아닌 무근거의 지표(비역사성, 가짜 역사僞史), ‘자립’해본 적이 없는 ‘문화 혼성화’의 과정이다. 이 때문에 근현대미술에 관한 역사 진술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전통미술(회화)의 문맥에 근거한 ‘20세기 근현대 미술 다시 읽기’는 여전히 선결 과제가 아닐 수 없으며, 전통회화와 문맥이 닿는 ‘동양화(한국화)’에 관한 한 그간 한국의 현대 미술사에서 저평가되거나 배제된, 그래서 망각되어버린 《국전》이 그 ‘보고’이기도 하다.


Ⅱ. 전통회화의 문맥 – 진경산수와 문인화  

1.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와 ‘문인화’ 전통

  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와 단원 김홍도  
전통회화사에서 조선 후기로 구분하는 영조·정조시기는 이른바 진경산수와 풍속화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회화 양식이 꽃핀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산수화는 흔히 ‘진경산수화’라 일컬어진다. 이는 북종화의 기법과 남종화의 특질을 융합한 기법을 구사하여 조선의 특정 지역에 위치한 실경을 그리면서도 화가의 감흥을 중시한 독자적 화풍을 뜻한다.(그림 1, 2) 이런 맥락에서 겸재의 진경산수는 겸재 이전 시대에도 있었던 사경산수(寫景山水)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예술적 성과를 받아들여 독자적 화풍을 이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겸재에 이어 당대를 대표한 화가로는 사의적 남종화풍을 수용하면서도 실경산수를 남긴 표암 강세황과(그림 3),  인물(도석, 속화 등), 산수, 화조, 영모 등 거의 모든 장르에 능했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있다. (그림 4)

  나. ‘사의’의 연원과 추사 김정희의 예술론
조선시대에 남종화풍이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부터 각종 ‘화보류(畵譜類)’가 전래되면서부터이며, 숙종 연간 이후 남종화는 화단을 주도하는 화풍이 되었다. 남종화를 수용하면서 중시된 ‘사의(寫意)’란 사물의 형태를 자세히 묘사하는 ‘형사(形似)’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뜻(意)’을 옮긴다(寫)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뜻’은 그림에서 전통회화에서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표현되어 왔을까?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해석하면 사의는 ‘언어’적이거나 개념적인 ‘뜻’으로 담은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개념이지만, 아래 노신(魯迅)의 글은 ‘사의’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화공들의 작품이 공교하고 치밀하기만 하고 운치가 없으며 보잘 것이 없는 것은 그들에게 창조적 정신을 발휘할만한 전문 지식과 기회를 주지 못한 때문이요, 문인화는 아취가 많고 기술상으로 필묵기운이 떠돌아서 취할 점이 많으나 사의(寫意)에 치중한 결과는 사물의 형상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까지 되니, 우리 청년 미술가들은 반드시 문인화가의 작품에서 아취와 교양적 토대를 본받는 동시에 화공들 작품에서는 정교하고 치밀한 기술을 본받음으로써 비판적으로 양자의 우수한 점을 살려야겠다.

‘사의’와 관련에서 유의해서 보아야할 구절은 ‘사의에 치중한 결과는 사물의 형상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까지 되니’라는 부분이다. 여기서의 ‘사의’란 사물의 구체적 재현성과 거리가 먼 필묵의 유희에 가까운 정신적 흥취를 뜻함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시대와 작가마다 ‘사의’는 다르게 해석되었으나, 거슬러 올라가면 노장(老莊)사상 및 선불교적 의미의 ‘의(意)’ 와 성리학적 의미의 ‘의’가 혼재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장·선불교적 의미의 ‘의’는 왕필의 『주역』 해석서인 『주역약례』 중 괘상(卦象)에 대한 해석 부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장자의 ‘득어망전(得魚忘筌)’ 사상을  언(言)→상(象)→의(意) 개념에 적용한 것으로, 이를테면 언어(言)는 이미지(象)를 위해 존재하고, 이미지는 뜻(意)을 위해 존재하므로 ‘뜻’를 얻으면 ‘이미지’을 잊어도 상관없고 이미지를 얻으면 ‘언어’를 잊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는 언어를 잊어야 하고, 의를 얻기 위해서는 상을 잊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노장적, 선불교(선불교는 노장의 언어로 ‘격의格義’된 불교임)적 의미의 ‘의’란 오히려 반개념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고도로 채색화가 발달한 이후에 성립한 수묵화도 그렇지만 문인화적 전통에서 이미지보다 뜻을 중시하게 된 데에는 ‘뜻’밖의 사상적 배경이 깔려 있는 셈이다.

이런 문맥에서 진(晉)의 왕희지(王羲之)는 ‘뜻이 붓보다 앞서야 한다’는 ‘의재필선(意在筆先)’을, 고개지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남제의 사혁에 의해서는 『고화품록』 「화육법」에서 ‘골법용필’을 통한 ‘기운생동(氣韻生動, 즉 기는 리듬을 가지고 있고, 그 기는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화론이 성립되었다. 동아시아 전통회화에서 ‘사의’가 실제 그림에서는 언표불가능한 방식의 자유분방한 필치, 운치, 흥취로 드러나는 경향이 많은 것도 이러한 화론의 전통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내려올수록 기운생동론도 의미가 바뀌듯(송대에는 기운생동이 타고나야 한다는 ‘천분론’으로, 청대에 와서는 ‘필묵의 기교’로 변했다), 사의도 그 뜻이 바뀌어왔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겸재나 단원, 또는 혜원이 한 실경이나 속화에서 성취한 ‘형사’를 배격하고 ‘사의’성에 역점을 둔 문인화를 추구했는데, 이는 그가 산 시기의 시대적, 문화적 배경인 청조(淸朝) 문화와의 폭넓은 교유로 이루어진 것이다.
추사는 청나라를 통해 받아들인 고증학적, 실사구시적 학문을 통해 ‘남종 문인 산수화건 묵란이건 조선이 화단이 이를 제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고 보았다. “마음속에 오천 자가 쌓여 있어야 붓을 들 수 있고, 서품과 화품이 모두 한 단계 초월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단시 세속의 장인으로 타락하게 된다.” 는 추사의 말은 그의 예술론이 특히 인품과 학식을 중시했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태도로 김정희는 역대 서예론을 바탕으로 ‘비학’과 ‘첩학’을 절충하고자 했다.

그런데 추사의 예술론은 이러한 학문적 차원에서의 기본적 법을 넘어 규정너머 개인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를 긍정하는 ‘천기(天機),’ ‘정신(精神)’과 ‘흥회(興會)’, 기굴(奇崛)을 중시했음을 기록으로, 무엇보다 수많은 그림과 글씨로 남기고 있다. 이러한 예술론 및 서화가로서의 추사의 독보적 성취의 배경에는 당대의 대표적인 ‘경화세족’에서 하루아침에 가문이 몰락하고 이로 인해 생애 후반 대부분을 유배생활로 보내야했던 불행한 삶이 있다.  
학문적 바탕이나 화론의 깊이 면에서 추사 당대에는 그와 필적할만한 인물이 없었으므로 추사가 활동한 시기인 19세기 전반기는 김정희 일파로 지칭되는 문인화 시대였으며, 주로 ‘소림모정류’의 그림이 그려졌다. 19세기의 후반기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987)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화풍이 성행하는 데, 이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풍조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 20세기 전반기의 동양화와 조선미술전람회

가. 전통회화의 맥 – 일제강점기의 미술정책과 동양화단

20세기 들어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 8월, (일본)황제에게 충량한 일본 신민 양성한다는 「조선교육령」 에 따라 미술교육 또한 이러한 동화 정책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미술학교가 따로 없이 ‘도화(圖畫)’라는 이름으로 각 학교에 실시되었던 미술교육은 전통적인 교습방식과 달리 서구적인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1910년대에는 중앙학교의 고희동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 사범학교 출신 일본인 교사들이 도화를 가르쳤다.
이 시기에 오원 장승업의 영향을 받아 중국 상해에서 출판된 ‘화보류’의 도상과 구도를 차용한 그림을 그려왔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은 서화미술협회(1912~1920년)를 통해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1899~1978), 최우석, 오일영 등의 제자들을 길러냄으로써 조선시대 전통회화와 근대 동양화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문화지배 정책이 강화되는 추세에서 전통회화의 존재 가치는 점점 더 미약해지고 심지어 구악(舊惡)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1916년, 이광수는 ‘옛 조선회화는 주제가 다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는 신선하고 당대의 생활과 관련된 장면들을 그려야 한다’고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변영로는 “근대 조선화는 비활동적이고 보수적이고 처방적인 것으로 생명이 있는 예술이 아니다”라고 규정하면서 “이러한 허위의 예술을 가진 사회는 점점 퇴화하여 잔패해질 것이며, 또 이러한 예술적 공기 속에서 사는 국민은 신앙 상으로나 도덕상으로 침체하고 부패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미술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3·1 독립선언서를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데 주력한 변영로의 견해는 구습과 진부한 전통 문화의 타파를 부르짖으며 일본에 수용된 서구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을 역설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중심으로 한 1910년대 일본 유학파의 주장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처럼 변영로가 제기한 전통회화(동양화) 혁신론은 당시 동양화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이처럼 전통회화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전통회화의 맥은 이어지는데, 근현대 화가로서 비평가로서 남북한 통틀어 후대에 영향을 준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1904~1967)의 오월일사(吾園軼事) 일화는 일제강점기의 문화적 정황은 물론 전통회화의 맥이 어떻게 현대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의 단면을 보여준다.  

   나. 일제강점기 조선문화 지배 정책과 조선미술전람회 개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는 일본 《제국미술원전람회》(이하 제전)를 모델로 해서 일제의 조선 통치 방침에 의한 ‘조선 문화 지배 정책’, 즉 ‘문화 정치’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도해서 1922년에 제1회 선전이 개최된 이후 1940년까지 매년 개최되었다.    
《선전》은 처음에 1부는 동양화부, 2부는 서양화 및 조각, 3부는 서예로 영역을 나누었다. 이 때부터 전통회화는 ‘동양화’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는데, 한일병탄 이전부터 다수의 일본인 화가들이 한반도에 정주해서 활동하고 있어서 ‘조선화’가 아닌 ‘동양화’로 명칭을 정하게 된 것이다.    
《제전·문전》의 심사위원들에게 《선전》의 심사를 의뢰하였다. 《선전》의 전반기인 1930년대까지  는 선전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낸 동양화부를 제외하고는 조선인 입상자는 극소수였으며, 이후 선전이 끝날 때가지 총 입선자 수가 35%에 그칠 정도로 당시 조선전람회에서도 많은 일본 작가들이 활동했으며, 그만큼 일본미술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화부는 수묵화와 채색화로 구분되었는데, 수묵화는 청전 이상범의 산수화가, 채색화는 이당 김은호 식의 미인화풍이 대세였다. 수묵화의 경우, 초기인 1~4회까지는 전통적 양식의 관념적 산수화가 많이 그려졌으나 5회 이후에는 사생적 실경산수화풍이 성행하는데, 수묵화 분야에서는 청전 이상범의 영향이 컸다.  


Ⅲ. 동양화 탄생과 문화혼성적 특성

1. 전통회화와 일본화의 만남- 새로운 회화의 길을 열어 간 작가들

  가. 이상범과 ‘청전 양식’
1916년경부터 3년간 안중식과 조석진 등에게서 전통 화법을 익혔고, 졸업 후에도 노수현    과 함께 안중식의 화실인 경묵당(耕墨當)에 머물며 지도를 받았다.
강습소의 마지막 졸업생격인 이상범은 서화미술회 출신들이 주축을 이룬 ‘조선서화협회(1918)’에 참여해 1921년부터 《조선서화협회전》(이하 《협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된 《협전》은 우리의 근대적 민족미술을 세우려는 단체전이었다. 그가 이런 활동을 하게 된 배경으로는 1919년과 1920년 스승 안중식과 조석진의 연이은 타계, 그리고 3·1운동의 자주적 운동에도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상범이 시도한 새로운 화풍은 《협전》 출품작과 이듬해 창설된 총독부 주최의 《선전》춤품작으로 알 수 있다. 이상범은 제1회 《선전》부터 출품하는 데, ‘청전 양식’의 기원을 이루는 ‘사생적 산수화(동양화)’는 제2회 《선전》에 출품한 〈모연(暮煙*해질 무렵)〉부터 시작한다. 《선전》을 통해 일본화와 서양화를 보면서 자연히 사생적 풍경으로서의 동양화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이상범은 새로운 회화의 길을 찾기 위해 1923년 3월 노수현, 변관식, 이용우(李用雨,1902~1952)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 미술동인회인 ‘동연사(同硯社)’ 결성하였다. 동연사는 재정난 등으로 그룹전과 같은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동인들은 작품을 통해 새로운 회화세계를 펼쳐 보였다. 동인들 중 이상범의 변모가 두드러져 제3회 《협전》에 출품한 <해진 뒤>는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 무렵 《선전》에 출품된 청전의 그림들은 필선이 약화된 선염법 위주의 기법이 주요 화풍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특성은 당시 수묵 풍경화 계열의 작품에 이미 일본적 영향이 가미되었음을 의미한다.  

1923년경부터 보여주는 수묵을 위주로 한 사생적 풍경화는 청전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추구되었다. 그림의 소재 또한 논과 밭이 보이는 농촌 풍경과 산야를 선택하여 서정적 정취가 배인 그의 회화의 특성을 드러내었다. 향토적 ‘신자연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그의 회화세계는 1926년 제5회 선전 출품작 〈초동(初冬)〉(도판 5)에 이르러 초기 전통 화법과 새로운 사생 기법의 혼용에서 오는 생경한 화풍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그림은 수확이 끝나 초겨울에 접어든 논밭과 농가, 잎을 떨궈내어 가지만 남은 나무들, 멀리 운무를 머금은 산으로 구성된 산수화이다. 크기와 명암이 다른 리듬감 있는 독특한 점들을 사용하여 한국적 정감이 나는 화면을 창출하였다. 또한 〈초동〉은 근경을 서양의 풍경화나 사진처럼 감상자의 눈앞 가까이부터 배치함으로써 관념 산수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장면을 그려냈다.

청전이 《선전》에서 특선에 입상한 이후의 화풍은 황량한 분위기의 풍경 선택, 짧게 반복한 갈필의 언덕이나 산 처리, 나무나 안개의 표현 등 당시 일본 남화 풍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특히 위기를 우려내는 데 중점을 둔 이른바 '몽롱체'라는 화풍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래서 이태준 같은 소설가는 당시 ‘일본화 열’에 대해 첨예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특히 해방이후 이상범이 추구한 그림의 변천 과정 이면에는 자신의 친일 전력에 대한 콤플렉스도 없지 않지만 그가 성취한 예술세계가 당대 동양화단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

무엇보다 청전 예술의 황금기라고 보는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초반에 성취한 예술세계의 독자성은 그의 그림의 근간이 전통회화임을 드러낸다. 이는 조선 후기 김홍도가 그린 산수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그림 6, 7)에서 볼 수 있는 단원 김홍도 그림의 특징, 이를테면 짧은 선들이 흐트러진 듯한 필선 처리는 청전 이상범 산수화에도 이어지는 특징들이다. 물론 단원과 청전 그림은 차이점(단원의 필치가 더욱 담백하면서 선연한 느낌을 준다면, 청전의 그림은 아스라한 유현미와 함께 가로 폭이 긴 종이에 그려 수평성을 강조한 점을 꼽을 수 있다)도 있지만, 특히 수지법과 나뭇잎에서 볼 수 있는 흐트러지는 듯한 붓질과 선염(渲染)으로 발현되는 정취가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이상범의 그림은(이번 전시회에서 작품이 걸리지 못했지만) 특히 1955년에 그린 ‘산수’<도판8>는 ‘전통 문인화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청전 특유의 실경을 보여줌으로써, 관념을 넘어선 사의적 특성’을 보여준다. 특히 제12회 《국전》 출품작인 〈영막〉(도판 9)이나 제 14회 국전(1965)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품했던 〈효원(曉原)〉 (그림 10) 작품 같은 경우는 긴 횡폭의 구도, 부드러운 필선, 깊이감과 유현함이 느껴지는 먹의 농담, 포플러 나무의 배치 등에서 그가 도달한 만년 회화의 전형을 드러낸다.  

청전의 제자 중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동양화가로서 《국전》을 주도한 작가로는 먼저 배렴(裵濂, 1911~1968)을 꼽을 수 있다. 배렴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청전화숙’에서 이상범의 제자로 동양화에 입문하여 1929년 제9회 서화협회전람회에 「만추(晩秋)」를 출품한 뒤 1936년 서화협회의 마지막 전람회까지 해마다 출품하였다. 1930년부터는 《선전》에도 출품하여 연이어 입선하며, 1936년과 1943년에는 〈요원(遼遠)〉과 〈산전(山田)〉이 특선을 차지했다. 이 시기 출품작들은 전적으로 스승인 이상범의 작풍(作風)과 화의(畵意)를 본받은 작품으로 향토적 풍경을 주로 수묵담채로 그린 것이다.
1939년에 배렴은 청전화숙을 나와 금강산 일대를 답사한 뒤 이듬해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이때부터 청전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주었다.
1949년 《국전》이 창설되면서부터 추천 작가·초대 작가로 참가하였으며, 1953년부터 1967년까지는 계속 국전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당시 동양화단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나. 소정 변관식의 적묵 산수
소정 변관식 또한 청전과 같이 초기에는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래서 변관식은 초기(1920년대 초반)에는 심전 안중식의 영향이 짙은 청록산수 및 관념산수 계열이나 기명절지화를 그렸다.
이후 1925년에 김은호와 함께 일본에 유학을 가서, 일본 남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생이 되어 5년간 지도를 받았으며,  이 시기 중인 1927년 제6회 《선전》에서는 일본 남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1929년 제8회 《선전》이후에는 더 이상 《선전》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으며, 1943년 이후에는 주로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며 그림에 정진하였다.  

변관식의 화풍은 1957년경부터 두드러진 변화를 겪는다. 〈농촌의 만추〉(그림 11)가 바로 그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문지르듯 겹쳐 그은 짧은 선을 통해 윤곽과 음영을 동시에 나타내는 화법을 선보이며, 추수를 마친 늦가을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을 서정적이면서도 세밀하게 담아냈다. 이후 소정은 본격적으로 동양화 특유의 관념성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풍경을 압축적이고 사실감 있게 담아내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하였다.(그림 12)

소정은 제1회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경독(耕讀)〉이란 작품을 출품한 이래, 제3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제4회 《국전》에서는 초대작가로, 제5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로 참여하였으나, 심사과정에서의 갈등으로 노수현에게 냉면 그릇을 던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국전》의 중심 세력이던 노수현, 배렴, 이상범과의 의견 대립 및 평상시의 반목이 폭발한 것이다. 이후 제6회 《국전》에서는 초대작가로, 제10회 《국전》에서 추천작가로 출품한 이후 한동안 출품하지 않다가 제21회 《국전》에 출품한 이후에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국전 초대작가로 선정되었어도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    

청전이 진경산수 전통을 계승, 야산과 시냇물, 평화로운 농가 등 시정(詩情)의 세계를 수묵과 담채로 은은하게 묘사한 것과 달리 소정의 그림은 가장 옅은 먹에서 짙은 먹까지 점차 먹을 쌓아가는 집적의 과정이자 흔적인 ‘적묵(積墨)법’과 함께 묵점을 찍어 선을 파괴하는 ‘파선법’이 주요기법이며, 시점이 다른 경물을 한 화면에 담아내었다. 이른바 ‘6대가’ 중 소정은 가장 개성적인 필치(적묵법)로 전통적 화풍을 심화하여 독창적 실경산수화풍 창안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 의재 허백련의 관념적 ‘사의’ 산수와 호남의 동양화단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은 진도 태생으로 처음에는 근현대 시기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의 아들인 미산(米山)에게 그림을 사사해서 남 화단의 맥을 이은 화가이다. 의재의 초기 화풍은 〈녹음간사〉(그림 13)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에서 법학을 배웠으나 당시 일본 남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으로부터 사사를 받은 이후 화업에 정진하였으며, 연진회(鍊眞會)를 만들어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연진회는 1944년에 문을 닫았으며, 해방이후에는 1955년에서 1959년까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이후 말년까지 의재는 사의성 짙은 독자적 관념 산수를 그렸다.(그림 14)
호남 화단의 그림이 근현대회화사의 한 면을 차지한 것은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유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치가 점을 찍었다면,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에 이르러 선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금봉 박행보와 옥산(沃山) 김옥진((金玉振, 1927~2011), 그리고 나상목에 이르러 호남의 동양화는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남농 허건(1908~1987)은 소치 허련의 손자이자, 미산 허형의 4남으로 태어나 허백련과 함께 호남화단의 맥을 이은 화가이다. 남농의 화업은 1930년 《선전》에 입선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전통화 수련기인 1930년대에는 조선 말기 이래의 전통화풍, 1940년대에는 일본화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현존하는 작품으로 알 수 있다. 1942년에 그린 〈목표교외〉(그림 15)란 작품은 목표 유달산 근교의 야산을 그린 작품으로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일본화풍의 채색화 기법이 엿보인다.  
1945년 해방이후 남농은 일본화를 극복하기 위해 채색화 기법을 버리고 수묵기법을 활용하여 주변의 일상적인 농촌풍경을 주요 소재로 삼은 새로운 그림을 선보인다. 그는 이러한 자신만의 화풍을 ‘신남화’로 명명하고 이론을 정립하여 『남종회화사』를 발간하기도 했다.
남농은 1970년대 이후 남도 지역의 산수를 정형화한 그림을 그리거나,(그림 16) 소나무 그림을 많이 그린다. 특히 소나무 그림은 그의 독특한 거칠고 빠른 속필, 농묵과 담묵의 대비 효과로 남농 그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번 전시회에서 옥산의 작품은 〈폭포〉 (그림 17)가 전시되었는데, 옥산은 의재의 문하에서 수업과정을 밟았고 스승이 그러했듯 철저한 전통화법의 수련한 후 독자적 표현에 도달한 작가이다. 그의 아래 말은 전통산수화의 ‘사의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 잘 알게 한다.

내가 말하는 산수화는 풍경화와는 격이 다르며 사경(寫景)산수화와 그 품격이 다른 관념산수화(심상心象 풍경)이다. 작가의 마음속에 있는 심상이미지를 창출해내는 사의화(寫意畵)를 말하는 것이다. 눈을 지긋이 감고 명상에 잠기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경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중략) 산수화는 대상의 겉모습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 작업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중요시해야 한다. 뼈가 있어야 하며, 운의(韻意)와 격조(格調)가 있어야 하므로 우리네 인생살이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것인가.
오늘 날 한국사회는 우리 것보다 남의 것을 좋아하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어 전통을 중시하는 우리 화단에 파문과 갈등이 일고 있다. 물밀 듯이 밀어닥치는 외세에 의해 조상 전래의 질팍한 전통적 미술양식이 몸살을 앓으며 표류하고 있다. 5천년 문화민족의 긍지가 위태롭기만 하다.
이번 전시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옥산의 그림은 기법의 기본적 요소들과 함께 ‘사의’는 의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극히 부드럽고 섬세한 습필(濕筆)을 주로 구사하는 옥산 수묵담채의 특질은 의재의 심의 표현이 내포하는 의고적 관념 산수와 달리 실경 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필치는 매우 밀도 있으며 치밀하다. 동시에 그의 산수화는 다양하고 자유로운 구도와 묵법 및 담채의 풍성한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호남화단의 작가로서 《국전》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전통회화의 맥을 현대적 어법으로 발현한 이로는 나상목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51년 묵로 이용우에게 1년 남짓 사사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독학으로 전통회화 기법을 습득한 후 현대적 기법을 혼용한 그림을 남겼다,(그림 18, 19)

  라. 심산 노수현의 사의적 공간 산수
안중식은 자신의 아호인 '심전(心田)'에서 한자씩을 떼어 노수현에게 '심산(心汕)'을, 이상범에게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내릴 정도로 두 사람을 애제자로 여겼다. 해방 후 이상범은 홍익대에서(1950년 창설된 홍익대의 동양화 실기 교수로 1961년 정년 때까지 재직), 노수현은 서울대에서, 각각 후진을 양성하여 현대 화단의 양대 인맥을 구축하게 되었다.
노수현의 제1회 《국전》 출품작에 대해 근원 김용준이 6대가 중 ‘먹색과 밝은 공간처리가 좋고, 그의 화폭의 넓은 점이 누구도 따르지 못할 실력’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그의 기량은 출중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을 통해서도 당대에는 달리 유례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유려한 운필과 맑은 기운을 드러낸다.(그림 20)


Ⅳ.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 –‘전통회화와 서구미술의 혼성’

1. 유사 앵포르멜 열풍과 동양화단

1950년대 후반부터 우리의 미술계는 순전히 서구적 문맥에서 ‘전위’적 양상으로 출현한 유럽의 전후 추상미술인 앵포르멜 미술(Art-Informel)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당시 서양화단의 앵포르멜 열풍 현상은 우리 현대미술이 왜 다시 기술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의 핵심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미술 서구와 같은 미학적 기반이 부재한 상황에서 ‘왜 추상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 없이 추상미술이 유행했다면 이는 이러한 양상이 어디선가 이식된 것임을 뜻한다.

1956년 11월, 일본의 도쿄 니혼바시 다카시마야(高島屋)에서 열린 《세계 오늘의 미술》전은 당시 일본 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니, 이른바 ’앵포르멜informel 열풍‘이다. 이 전시회는 전후 유럽에서 활동한 비구상, 초현실주의 작가 중심으로 일본아트클럽 회원 작가, 그리고 프랑스 미술평론가 미셀 타피에(Michel Tapie)가 선정한 시니피앙 드 랭포르멜(Signifiants de l’informel’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회이다. 이들 중 마지막 일군의 작가, 즉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1898~1964/프랑스),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프랑스), 조르주 마티외(Georges Mathieu,1921~  /프랑스 ), 샘 프란시스(Sam Francis, 1923~1944/프랑스), 카렐 아펠(Karel Appel,1921~2006/네덜란드) 등과 같은 ‘앵포르멜 작가들에게 관심이 집중이 되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이들이 일본 미술계를 장악했다.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까지 유행한 한국 앵포르멜 미술도 일본의 영향임을 부인하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오히려 이상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영향을 제외하고는 앵포르멜 미술이 성립한 어떤 문맥적 근거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유사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추상미술이 유행하며, 이 와중에 자신의 작업을 현대화하는 계기로 삼아 자신의 미술세계를 지속적으로 천착해온 작가들도 있다. 하여튼 이러한 양상은 전통회화를 기반으로 한 동양화단에도 큰 영향을 주었음을 당시 《국전》 출품작가들의 작품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2.전통회화의 추상화를 시도한 주요 작가들

안동숙(安東淑, 1922~2016)은 원래 김은호의 제자로서 ’후소회‘ 회원이었으며, 초기에는 《선전》을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1950년대 말까지는 지방에 거주하고 있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다가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 낙타 2마리를 수묵화 기법으로 그린 <대망>으로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면서 주목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60년대 초반 당시 서양화단의 앵포르멜 미술에 영향을 받아 실험적 기법과 실험으로서 전통적 관념주의를 극복하고자 한 그룹인 ‘묵림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65년 14회 국전에 <얼룩진 기사>라는 추상 작품을 출품한 이후 약 10여 년간 ‘현대’라는 시대에 대응하고자 한 다양한 추상 작품을 남겼다.(그림 21) 나아가 그는 심지어 전통회화의 표현재료인 지필묵에서 벗어나 수성 페인트, 유채성 안료, 여러 가지 물질의 콜라주 시도 등 실험적 방식의 재료로써 지속적으로 새로운 기법을 모색했다.

박노수는 이상범과 장우성의 제자로서 간결하면서도 운치 있는 필치로 화면을 나누고 청색과 노랑 같은 강렬한 원색의 담채로 관념적이지만 현대적인 감각의 산수화를 남겼다. 그러나 제11회 《국전》 출품작은 그도  60년대 초반에는 당대 서양화의 추상미술에서 볼 수 있는 물질감이 두드러진 특질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그림 22)  
박노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서구미술의 혼성 >파트의 작가군으로  전시되었지만, 전통회화 문인화의 격조와 사의성을 중시하는 〈고사(高士)〉 연작을 많이 그렸다. 추사 김정희  <고사소요>(도판 23)란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 고사는 홀로 자연을 관조하는 전통문인화의 주요 소재였다. 박노수의 그림 속 고사는 탈속한 선비의 모습으로, 김정희의 문인화에 나오는 인물과 거의 흡사하면서도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초월적 남자의 모습으로 흔히 빈 여백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나온다.(그림 24)  그는 세련된 필치와 여백을 바탕으로 청색과 노랑의 대비로 문기어린 화풍을 창안해냈다.

오태학 역시 1960년대 서구 앵포르멜 미술에 자극 받아 대응 차원의 추상미술을 발표했다.
1960년 제10회 국전에서 <군우>로 문교부 장관상을 받았으나 그 이듬해부터 큐비즘적 시각의 추상화 양상을 보이다가, 1963년부터 실험적 추상 작품을 추구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으로서15회 국전 출품작인 〈수〉는 전통산수의 필획적 요소를 살리면서도 스며드는 짙고 옅은 먹과 댐채 효과로써 독특한 질감을 드러내고 있다.(그림 25)  

민경갑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해서, 1953년 대학 3학년 재학시절 제 5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화단에 입문해 이후 1960년대에 초반 국전에서 동양화가로는 비구상으로 연속 3회 특선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전통회화로서의 조형적 기법을 근거하면서도 서구 앵포르멜 미술의 기법적 특성인 물질감, 혹은 마티에르를 보여준다. 종이에 번지고 스며드는 먹의 특성과 함께 앵포르멜의 물질감이나 마티에르와 유사한 표현효과를 추구하면서도 침봉으로 화선지에 구멍을 내거나 먹을 덧칠하는 등 실험적 표현기법을 시도했다.(그림 26)

정탁영의 이번 전시회 출품작은 화면을 극도로 단순화하여 수묵이 화폭에 스미는 미묘한 효과만을 드러낸 그림을 보여주는데, 이는 동시대 서양화가인 윤형근의 그림과도 유사성이 느껴지기도 한다.(그림 27)  

심경자는 1970년대 초반이후 《국전》을 통하여 탁본을 콜라주한 오브제 작품으로 입상하였다.
그는 통나무의 목리문이나 나무판의 물결무늬, 기왓장 문양, 떡살문양 등 다양한 재료으 탁본을 뜬 후 이를 화폭에 찢어 붙인 후 주변에 은은한 색채를 설채로 가미하여 공간감을 부여했다. 이번에 전시된 〈가르마〉(그림 28)라는 작품을 통해서도 이러한 심경자 작품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야말로 동, 서양화, 근현대 기법이 다양하게 혼재된 표현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이외 작가로 이석우는 이번에 전시된 〈융〉과 같은 극히 간결한 농담이 있는 필치의 대비로 여백을 살린 그림(그림 29)을 보여주며, 송영방은 제9회 국전까지는 전통 필치를 살린 풍속화를 그리다가 23회 국전에서는 <인고>라는 수묵의 우연적 효과를 살린 추상화를 선보였다.


Ⅴ. 현장 사생의 전통을 살린 동양화,

1. ‘제3의 실경- 전통회화의 현대화’

1960년대 중반 이후 전통회화가 서구추상미술에 경도되어 가는 현상에서 벗어나 ‘제3의 실경(삶의 현장)’을 찾아 새로운 화풍을 선보인 작가들이 《국전》에 등장한다. 이들은 당대의 트렌드와 상관없이 화면의 구성과 투시원근법 등 근대 서구미술의 주요 기법과 관점을 전통회화와 융합한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그렸다.


2. 현장 사생의 주요 작가들

오용길은 서구적인 방식의 소묘와 전통회화의 필력을 겸비한 ‘현대’의 전통회화를 보여준다. 그는 문인화적 관념 산수 전통에서 벗어나 당대의 현실이나 일상적 자연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도 어디까지나 전통적 기법인 수묵과 담채기법을 전통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드러낸다.(그림 30)

창운(蒼暈) 이열모(李烈模, 1933~1916)는 월전 장우성과 노수현의 서울대 미대 초창기 제자이다. 그는 미국 유학 후 서구 회화의 원근법과 음영법을 전통회화에 적용하되, 근대 서구의 풍경화와 같은 화면 구성법을 취하면서 기법적 측면에서는 전통적 수묵담채로 실제 풍경을 마치 유화나 파스텔로 그린 듯, 완성도 높게 그려냄으로써, 이전의 전통회화와도 다르면서도 서구근대회화라든가 일본의 채색화와도 다른 새로운 회화의 길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청운고색〉은 이러한 그의 그림의 특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다음 말들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와 주된 관심을 짐작하게 한다.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고독하지만 맑은 꿈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산천에는 현실의 속진(俗塵)을 걷어낼 수 있는 ”지혜가 스며 있다.” “사생은 생의 모든 것을 함축한 인생 노트인 셈이다.”
특히 이번에 전시된 작품인 〈청운고색〉은 한국의 실경산수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그린 그의 화풍의 특색을 자 드러낸다.(그림 31)

이인실의 1980년 제29회 심사위원 출품작인 〈추교〉(그림 32, 33)와 같은 작품은 마치 동양화와 서양화가 혼재된 듯한 풍경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서양화를 전공하다 동양화로 전공을 바꾼 특이한 이력을 지님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인실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장면은 주로 전형적인 당대의 농촌 풍경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서구적인 시점인 원근감을 드러내면서도 우리 전통회화 특유의 맑은 수묵담채로 당시의 시골 풍경들을 정감 있게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의 그림들은 ‘전통 관념산수의 기법을 특성을 계승하면서도 시실경을 포착하는 방식은 작가 특유의 친근하면서도 넉넉한 공간을 담아내었다고 할 수 있다.    


Ⅵ. 나가며

이 글은 그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서구적 프레임으로 진술되어온 한국 현대미술과 달리 메타적 관점인 문화적 후위 현상으로 재조명하는 취지에서, 《국전》 참여 작가들 중 주요 작가들의 예술적 성취를 살펴봄으로써 미술사에서 배제되었던 《국전》 참여 동양화가들의 작품을 발굴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쓴 것이다.

《선전》은 ‘식민지 통치 정책’으로 《국전》은 ‘신생 정부’에서 개최된 관전이었다. 《선전》은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지배 이념을 강요한 조선총독부에 의해 개최되었던 관전으로서 일본 관전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만들어진 《국전》은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조선미전의 체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유파 간 갈등에 의한 심사 비리 같은 문제가 있었다. 또한 《국전》은 대한민국 정부에서의 시대적 요구에 따른 민족적 정체성 추구를 일제 강점기를 통해 행해졌던 동양성과 조선색 등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 작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던 산수화 및 인물화의 제재와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 경향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글을 통한 간략한 고찰에서도 드러나듯, 어느 지역 어느 시대나 교류로 형성되어 온 문화의 특성상 순전히 부정적 측면만으로 《국전》을 단정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근현대 시기의 주요 동양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그간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혹은 구시대 식민문화의 피해자로서 우물 안 개구리로 여겨왔던 근현대 동양화가들이 실제로는 훨씬 더 진지한 고민과 모색의 길을 걸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의 문화적 유입의 강도가 충격적일 정도로 클 때 크게 세 가지로 상반된 작가적 태도를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무비판적 태도로 무비판적, 혹은 감각적으로 외부의 ‘유형’을 받아들이는 경우라면, 두 번째는 문화적 유입의 강도와 상관없이 무조건 전통을 고수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유형을 받아들이되 어떻게든 그것을 자기화하려는 계기로 삼아 독자적인 예술성을 성취하는 경우이다. 예술적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경우는 세 번째라 할 수 있다. 근현대 동양화가 중에서도 외세에 의해 전통적 문화의 기틀이 무너진 상황에서, 게다가 가치 의식의 혼미 상태가 지속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당대 미술계를 지배했던 일분화풍, 서구중심주의 풍조 속에서, 묵묵히 고심하며 전통회화를 기반으로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했음을 《국전》 참여 작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전》을 통한 근현대 동양화 다시 보기는 서구 현대미술과의 차이점을 준별하여 우리 현대미술사를 다시 쓰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전통회화의 맥을 이은 동양화에 나타나는 특성들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그간 《국전》 출품작이라는 이유로 잊혀진 작품들이 근현대 문맥에서 ‘무엇이 어떻게 미술일 수 있는가’에 대해 저마다의 물음과 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단계 우리의 미학적 프레임의 문맥적 근거까지도 차분히 성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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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V 심포지엄(편완식 세계일보 미술전문기자)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V - 심포지엄(이임수, 한국예술종합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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